마더

원래 개봉하면 빨리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우울한 기분에 보기 좋은 영화는 아닐 것 같아서 미루고 있던 중, 이러다가 잘하면 극장에서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저녁에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다음주에 잡혔던 약속은 취소하고 영화나 보자길래 얼떨결에 보고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봉준호 영화 중 개인적으로는 제일 맘에 들었다. 다른 영화는 전체적으로 괜찮음에도 불구하고 꼭 뭔가 이데올로기적인 부분을 유치하게 끼워넣는 게 못마땅했는데(끼워넣는 게 못마땅한 게 아니라 세련되지도 아니면 차라리 직설적이지도 않고 말 그대로 유치하게 끼워넣는 게 못마땅했음..) 이번 영화는 그런 게 아예 없어서 일단 합격.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황량한 풍경들이 자꾸 나와서, 그래서 좋았던 게 제일 큰 것 같다. 풍경보다 그냥 인물들이 중심이었다면 스릴러나 장르적인 느낌은 더 살았을지 몰라도 아마 내가 이 영화를 맘에 들어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황량한 벌판, 황량한 회벽, 또 황량한 벌판, 길, 벌판.. 중간중간 들어가는 황량하고 건조한 풍경들이 정서를 건드려서, 그래서 좋았다. 사실 영화를 볼 때 반전에 감탄하거나 하는 편이 아니라 이미 스포일러 다 찾아보고 상당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알고 영화를 본 거라 긴장감은 좀 없이 봤지만 대신에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풍경이나 김혜자 선생님 연기를 감상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김혜자 선생님이야 뭐.. 나야 이분 때문에 엄마가 뿔났다도 엄청 기대하며 봤던 사람이니깐 이분 연기야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새삼 감탄할 게 없었다는 게 아니라 당연 좋았다는 얘기. 오프닝씬은 다들 칭찬이 자자해서 오히려 뭐 그리 대단할까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진짜 눈물 날 뻔했다. 그리고 터미널에서부터 고속버스 안으로 이어지는 엔딩도. 이분 주인공으로 이런 영화 찍어줘서, 아니 이런 장면 찍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봉감독님.
솔직히 모성이나 가족애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누구나 다 아는 거고, 사람에 따라 모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집착이라고 생각할 수도 혹은 또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게 뭐든간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그 어떤 것처럼 보여서 너무 슬펐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업보인 것만 같고 그래서 애틋하면서도 괴롭고 슬픈, 그렇다고 기댈 데도 없고 온전히 혼자서 견디고 잊고 계속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 그냥 딱 오프닝씬의 그 느낌.

덧글

  • 2009/06/07 01: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편식 2009/06/07 01:14 #

    아 그랬군요 그런 아름다운 전설이 ㅠㅠ ㅋ 이거 역시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무 감흥 없었을텐데 민호군이 그랬다니깐 괜히 흐뭇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네요. (아니 고마운 건 또 뭡니까;;;)
    옙 덕분에 잘 받아왔구요 나오는 또 한명도 맘에 들고 재밌을 것 같아서 기대중이에요 감사합니다 ^^ 아마 다다음주쯤엔 볼 시간이 날 것 같은데 보고 나면 말씀 드릴게요 ^^
  • 2009/06/07 01: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편식 2009/06/07 01:28 #

    우와 세번째... 게다가 김혜자 선생님 무대인사까지 보신 겁니까 ㅠㅠ 전 어머니는 아니지만 워낙 제가 모성본능이나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편이라(그게 겁나서 결혼은 하더라도 아기는 가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을 정도라) 너무 이해됐구요 그래서 너무 슬펐어요 ㅠㅠ
    넣고 싶은 거 다 넣느라고 아쉬운 데가 생기는 것보다는 단순하더라도 완벽한 게 제 취향엔 더 맞는 것 같아요. 오프닝하고 엔딩의 김혜자 선생님, 그리고 풍경들 때문에 저도 한번은 더 보고 싶네요..
  • 2009/06/07 03: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편식 2009/06/07 03:16 #

    옙 저두 그래서 댁으로 가서 리플 달고 왔습니다 ㅋ
  • 나나 2009/06/25 15:30 # 삭제 답글

    편식닙~저 방금 분홍복면님 "댁"에 갔다가 편식님 마더 보셨다는 리플 보고 달려왔어요~~^ㅎㅎ 너무 좋았죠?? 특히 마지막.아..끝장였어요.노을 뒷편으로 실루엣만 보이는 관광버스에서 춤추는 장면.첫장면에서 혜자님 춤추는 장면은 뚱땅지같으면서도 머시기 순간 뭉클한데 이유를 모르겠다가 마지막장면에서 춤추는 장면은 아무래도 스토리의 끝인지라 정말 먼가가 내 가슴을 콱 후볐어요.사실 그 영화의 공들인듯한 스토리텔링과는 별도로 그 두 장면만으로 봉감독님에게 화가 났잖아요.당신은 이보다 더 잘할수 있었잖아요!! ㅋㅋ 같은 시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기묘한 느낌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 편식 2009/06/26 03:57 #

    나나님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 예 마더 진짜 너무 괜찮았구요.. 좋았다고 해야 할지 어떤 말이 적절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 지 삼주가 돼 가는데 아직까지도 오프닝하고 엔딩 장면이 자꾸만 생각나요. 봤을 당시에는 첫장면이 너무 슬퍼서 처음 받은 충격이 커서 그랬는지 마지막 장면도 너무 좋았지만 며칠동안은 첫장면의 그 느낌이 더 많이 생각났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지막 장면이 더 생각나네요.. 그 노을에 비친 실루엣들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ㅠㅠㅠㅠㅠ 이병우님 음악도 너무 좋았구요 ㅠㅠ 전 워낙 스토리에 감동을 받거나 하는 편이 못돼서 이미지나 느낌이 맘에 드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봉감독님 영화 중에선 저한텐 처음으로 이미지가 있는 영화였어요. 첫장면 마지막 장면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영화 내내 황량한 풍경화 같은 이미지들이 바람 소리가 안 들려도 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는.. 그런 느낌들이 참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춤추는 장면들은 뭐 말할 것두 없구요 ㅠㅠ 극장에서 와이드 화면으로 한번은 꼭 또 보고 싶은데 제가 좀 겁이 많아서 중간에 약간 무서웠던 장면들 때문에 못 보고 있어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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