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광선(1986)

에릭 로메르를 추모하며 나에게는 첫영화였던 녹색광선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봤다.
어떤 장르의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등장인물들간의 별볼일 없는 일상적인 대화들이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말도 못하게 신선했었는지, 그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살아나 신기했다. 지금이야 홍상수 영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장면들이지만, 아니 에릭 로메르에 비하면 홍상수 영화는 아직도 훨씬 더 편집된 대화같은 느낌이 든다는.
홍상수가 에릭 로메르 영향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녹색광선을 다시 보며 새삼 이렇게까지 비슷했었나 하고 깜짝 놀랐다. 초기작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밤과 낮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등 최근작들로 오면서 점점 더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서사보다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대화에 주목하는 기본적인 태도도 그렇지만 도시를 도시스럽게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보여주는 수수한 거리 풍경들이라거나 중간중간 삽입되는 손글씨 자막이나 음악이 아닌 음향효과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잠깐씩 삽입되는 클래식 음악 같은 형식적인 것들이 특히나 녹색광선의 경우는 정말 완벽하게 똑같았다. 최근의 홍상수 영화들이 다 일종의 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라 더 그렇게 보이는 걸까.
다른 점은 에릭 로메르의 등장인물들은 사랑할 사람을 찾고 있고 홍상수의 등장인물들은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을 찾고 있고, 에릭 로메르의 등장인물들은 예민하지만 소심하고 홍상수의 등장인물들은 예민하다기보다는 히스테리컬한 데가 있고, 에릭 로메르는 똑같은 남녀관계를 보며 재밌고 귀여워하는 느낌이라면 홍상수는 우습다 또는 웃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
형식적으로 아무리 똑같다고 해도 역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지금으로서는 유일하게 닮은꼴인 홍상수가 나이를 먹어가며 좀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준다거나(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홍상수 영화만의 가치는 충분히 있지만) 아니면 형식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에릭 로메르를 닮은 감독이 새로 등장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에릭 로메르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덧글

  • 분홍복면 2010/01/15 11:15 # 답글

    녹색광선, 이야기 참 많이 들었던 영화군요.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홍상수와 에릭 로메르 비교에 대하나 편식님 글 읽으니 딱 감이 오네요- 홍상수 영화는 갈수록 좋아지는 거 같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는데, 좀더 따뜻한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걍 해탈한 인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추리소설 보면서 느끼는건데, 원래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렇게 나오고, 원래 심성이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정겨운 광경을 그려도 그렇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물론 차가운 매력도 있는 것이지만- 살벌한 살인사건을 다룰때도 피해자 가족의 심정을 헤아린다거나 용의자로 몰린 사람의 억울함을 공감한다더나 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작가도 있느니까요 ^^

    참 딴 이야긴데ㅏ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읽고 있어요. 편식님이 왜 랭보의 시에서 이 책을 떠올렸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아직 앞부분밖에 못읽었지만, 어딘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랭보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편식 2010/01/16 22:54 #

    저도 홍상수 영화가 최근으로 올수록 조금씩 덜 냉소적이고 더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 기대를 하고 있어요. 분홍복면님 말씀처럼 따뜻한 사람까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시간이 흐를수록 최근작들의 유쾌함에 더해 인생에 대한 좀더 깊은 통찰력까지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원래 심성이 어떤지가 어떤 소재를 다루든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건 정말 맞는 말씀 같아요. 따뜻한 심성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통찰력으로도 나타나는 것 같구요. 사실 모든 사람을 애정을 갖고 자세히 바라본다면 악한 사람이나 악역 같은 건 있을 수가 없겠죠. 그래서 악역이 있을 법도 한데 없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작가가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으면서 저도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우와 드디어 읽고 계시는군요! 분홍복면님께서도 꼭 좋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리뷰 기대할게요!! ^^
  • 유령 2011/04/10 19:16 # 삭제 답글


    저는 에릭 로메르를 5년 전쯤에 처음 알게되어 즐거이 그의 영화를 보게 되었었죠. 홍상수 감독과 비교한 정성일 씨의 글을 보고 공감하지 않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는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필자의 말처럼 인생관의 차이 때문에 그럴수도 있고, 항상 로메르의 주인공들의 대화에 풍부히 흐르는 철학적인 관점과 로메르 영화 특유의 우아함, 예술성을 사랑하거든요. :) 에릭 로메르의 가장 큰 특징이 소설과도 같은 그 서사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보긴 하지만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일까요. (뭐 항상 홍상수씨의 영화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고, 요즘 나오는 영화를 볼수록 이 사람도 나이 먹어가며 따뜻해지고 있군이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 편식 2011/04/11 22:52 #

    네 저도 형식적인 면 빼고는 너무 많이 다르다고는 생각합니다.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의 인생관의 차이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관이나 대화도 많이 다르구요. 그런데 형식적인 면은 녹색광선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정말 놀라울 만큼 많이 닮았더라구요 ^^ 저도 홍상수 감독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는데 점점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라 언젠가부터는 에릭 로메르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영화 나올 때마다 기대하면서 보고 있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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