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모험(1997, 한길사)

지난 2천년동안 플라톤의 철학이론과 기독교의 직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경과 우애의 정서-즉 형제애의 개념-가 서구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데 지적인 정당성을 제공해 왔다.

앞장에서 우리는, 노예를 기초로 하는 사회의 개념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 하는 사회의 개념으로 진화해 가는 데 있어 철학과 법률과 종교가 서로 맞물려서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에 관해 고찰하였다. 이 변혁의 과정에서 철학은 그 일반성을 통해 공헌했고, 법률은 건설적 능력을 통해 공헌했으며, 종교는 도덕적 에너지를 통해 공헌하였다. 플라톤 철학에 의해 교정되지 않은 그 자체의 성격에서 볼 때 서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그 지역의 낡은 정신성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 종교들은 이 우주를 전제 군주와 노예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종교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러한 개념 속에 잠복해 있는 무시무시한 함의를 완전히 불식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제도는 다행히 철학적인 플라톤의 학설과 결합함으로써 지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 간헐적으로 솟구쳐나오는 정서적 힘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한 아름다운 사회학적 이상을 서양의 민족들에게 제공하였다.

그 초기 형태에 있어 기독교는 맹렬한 열광과 실행 불가능한 도덕적 이상을 내세운 종교였다. 다행히도 이러한 이상은 그 종교의 기원과 거의 때를 같이하는 시기의 문서 형태로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이러한 이상은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개혁 프로그램이며, 서양문명이 진화해 오는 데 있어 하나의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사회의 각 성원들이 이 근원적인 기독교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점차적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온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 (...) 기독교 창시자들과 그 초기 교인들은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사회의 유지를 고려하지 않고 이상적인 가능성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윤리적 직관에 자유재량권을 부여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였다. 사회의 붕괴는 분명해졌고 임박해 있었다. (...) 이러한 사정은 이 종교의 초기 기초형성보다는 그 초기 교인들의 심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이 교인들로 하여금 최초의 착상을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전승할 수 있게 하였다.

불교에 있어서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은 신비스런 평정을 통해서 이 세상을 포기하려는 프로그램과 결부되어 있다. 기독교는 불교적인 체념과, 현세의 유전 속에 세워진 '천년왕국'이라는 세련되지 못한 개념을 궁극적으로 삼는, 실행 불가능한 그 자신의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해 왔다. 이 두 종교의 차이는 개혁의 프로그램과 포기의 프로그램과의 차이에 있다.

진리를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우주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예컨대, 10까지밖에 셈하지 못하는 미개인은 작은 수의 중요성을 터무니없이 과장할 것이고, 우리도 몇백만에 이르게 되어 상상력으로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 그렇게 할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반드시 선이라는 것은 잘못된 도덕적 상투어이다. 사소한 진리가 커다란 악을 낳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커다란 악은 커다란 오류의 형태를 취하게 될 수도 있다. (...) 진리는 반드시 시의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진리는 '현상'에만 적용되는 규정이다. '실재'는 바로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리'란 '현상'의 '실재'에의 순응이다.

어두운 밤에 나타나는 '은하수' 즉 하늘의 희미한 빛줄기는 동시적 세계의 '현상'이다. 그것은 현상하는 그 세계의 '수용자' 내부의 커다란 영역이다. 그러나 '현상'을 낳는 기능이 있는 '실재'는 공간의 한복판을 통과하여,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무한한 시간을 거쳐 전달되는 빛에너지의 흐름이다.

크게 진리가 결여될 경우, 느낌의 힘을 '실재'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정도가 그만큼 제한된다. 그래서 허위에는 표현 능력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존재 속으로, 마치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불러들이는 마술같은 것이 없다.

(...) 사회가 문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성원이 다섯 가지의 성질, 즉 '진리', '아름다움', '모험', '예술', '평화'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이다.

'청춘'에 관한 가장 심오한 정의는 아직 비극에 접해본 적이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청춘의 가장 훌륭한 꽃은 경험에 앞서, 불분명하지 않은 교훈을 아는 일이다. (...) 청춘은 개인적 향유와 개인적 불쾌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민감한 쾌락과 민감한 고통, 민감한 웃음과 민감한 눈물, 민감한 배려의 부재와 민감한 사양, 민감한 용기와 민감한 두려움 등은 모두 청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청춘은 그 자신의 일에 즉시즉시 열중한다. 이러한 측면의 청춘은 너무나 변화무쌍하여 행복한 시기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 시기는 행복하다기보다 생기 발랄하다고 해야 한다. 청춘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청춘 그 자체보다 더 좋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억은 즐거웠던 날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일상적인 의미로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청춘에서는 절망이 압도적이다. 거기에는 내일이 없으며, 남아 있는 재난의 기억도 없다.

청춘의 근시안적 안목은 빈약한 경험과 맞물려 있다. 그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것은 그의 시야 밖에 있다. 아마도 그때 문학은 기만적인 의미의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래서 관대함과 잔혹함은 그것들의 충분한 결과가 예상권 밖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똑같이 자연스럽다. (...)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청춘'은 특히 행동의 아름다움에 대한 호소에 민감하다. (...) 시적・성서적, 또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단순히 문학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지식으로서 청춘이 일단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했을 때, 자기 포기(몰두)는 절대적이다. 어쩌면 비전은 지나갈지 모른다. 그것은 한 순간에 의식을 가로지를지도 모른다. 어떤 본성은 비전이 주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춘은 영혼의 활동과 개인적 활동 저편에 있는 이상적 목표와의 조화이기도 한 '평화'의 비전을 받아들이기 쉽다.

문명 사회의 활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고도의 목표가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다. 활기있는 사회는 어떤 터무니없는 목표를 내장하고 있는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적 만족의 안일한 충족을 넘어서서 방황한다. 강렬한 흥미는 모두 쉽사리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예컨대 훌륭하게 성취된 일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취에는 조화의 감각, 보람있는 그 무엇을 가져오는 '평화'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개인적 만족은 인격성을 넘어선 목표에서 생겨난다.

-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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