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1973, 문예출판사)

몇년 전 몇번 갔었던 합정역 근처 공장을 개조한 Anthracite라는 까페에서
소설 제목과 같은 이름의 커피콩을 팔고 있었는데,
같이 갔던 친구가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기억하고 있던 소설.
얼마 전 봤던 내가 싸우듯이에서 잠깐 언급이 되어 다시 생각난 김에 읽어 보았다.
친구가 좋아하는 이유는 모르겠고 나는 예술가의 고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묘사들이 꽤 맘에 들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영화로 보고 소설도 궁금했는데 언젠가 정말 읽어 봐야겠다.



* * *


그 이유는 토니오가 한스 한젠을 사랑하고 있었고, 또 그 때문에 벌써 여러 번 괴로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건 이미 패배당한 것이고, 괴로움을 달게 받아야만 하는 일이다 ― 이 간결하고도 악착스러운 진리를 이제 열네 살인 크뢰거는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경험을 잘 기억하고, 동시에 마음속에 새겨두고 어느 정도는 그런 일에서 즐거움까지 느끼는 성품이었다. 그러나 물론 자기의 인격 수양을 위해 그것을 추구하고 실제적인 효용 가치를 거기서부터 끄집어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진리를 학교에서 강요하다시피 하는 지식보다 더욱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소중하게 생각했고, 드높은 고딕 건물의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시간에도 이러한 판단을 속속들이 따지고, 샅샅이 되짚어보는 데 늘 골몰했다. 게다가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바이올린을 가지고(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니까)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러운 소리를 아랫마당 늙은 호두나무 가지 밑에서 춤추듯 뿜어져 올라가는 분수의 물줄기 소리 속으로 올려 보낼 때와 똑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그는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음은 원망과 동경으로 가득했다.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데 와 있는 것일까? 왜, 내 방 창가에 앉아서 슈토름의 《이멘호(Immensee)》나 읽으면서, 가끔 늙은 호두나무 가지들이 우울한 소리를 내는 저녁 어스름에 싸인 정원이나 내다보는 편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곳이야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곳이었다. 남이야 춤을 추건 신이 나서 멋있게 해치우건 저희들 마음대로 해보라지……. 아니다, 아니다, 여기야말로 내가 있을 곳이다. 내 비록 외롭고 먼 데서나마, 저 방 안에서의 그릇 소리와 떠들고 웃는 소리에서, 잉게의 그 따뜻한 목소리를 가려내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라고 해도 여기서 나는 잉게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너의 갸름한 웃고 있는 푸른 눈! 오, 그대 금발의 잉게여! 너처럼 아름답고 명랑하려면 《이멘호》같은 것을 읽거나, 스스로 그런 것을 써보려고 애를 써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슬픈 일이니까…….


토니오 크뢰거는 북쪽 나라에 앉아 약속했던 대로 자기의 친구,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에게 편지를 썼다. (...)
저는 위대하고 영감으로 가득 찬 미(美)의 소로에서 여러 가지 모험을 하여 '인간을 멸시하는 자랑스럽고 냉정한 사람들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필가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어떤 가능한 길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것, 생명 있는 것, 또는 평범한 것에 대한 저와 같은 속인다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훈훈하고 따뜻한 기운, 모든 자비로운 것, 모든 해학은 이러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이제부터 좀 나은 일을 해야겠습니다. 리자베타 ― 약속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바다 소리는 이곳까지 들려옵니다. 그리하여 저는 눈을 감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있는 정리되고 형성될 것을 원하는, 아직 탄생되지 않은 그림자와 같은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거기에 얽힌 그림자와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은 모두 제가 붙잡았다 놓아줄 것을 암시하고 제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또는 희극적인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합친 모든 그림자의 모습입니다 ― 그리고 저는 이런 그림자들에게 애정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정말로 깊고 가장 은밀한 짝사랑은 금발 머리, 푸른 눈을 가진, 맑고 씩씩한, 행복스럽고 사랑스러운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꾸짖지는 마세요, 리자베타. 그것은 선량하고 진실 가득한 사랑입니다. 그 속에는 그리움이며 우울한 선망 그리고 얼마 안 되지만 멸시하는 마음과 아주 청순한 행복감이 섞여 있습니다.

-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1903)



덧글

  • 2016/08/16 21:3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편식 2016/08/22 02:41 #

    ㅇㅇ님 잘 지내셨어요? 제가 어디 좀 다녀오느라 한동안 이글루에 못 들어왔어요. 다녀와서도 며칠동안은 정신 없어서 말씀 듣고 이제서야 예고편도 봤네요. 저도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는 아니지만 김성수 감독님이니 일단 믿어 볼래요^^
    오늘 덕혜옹주 보러 갔는데 정배우가 나오는 The SF라는 영화 예고편이 하길래 이런 것도 있었나 깜짝 놀라서 검색해 봤더니 광고더라구요ㅋ
  • 2016/08/22 02:5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편식 2016/08/22 03:05 #

    왓 포스팅 하는 사이에 다녀가셨네요 반가워요! :) 네 잠깐 여행 다녀왔어요. 다녀오면 시원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ㅇㅇ님께서도 그 광고 보셨군요. 요즘 진짜 자동차 광고도 하고.. 자동차 광고는 나레이션이 비트가 생각나서 어쩐지 좀 쓸쓸한 기분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ㅎㅎ
    ㅇㅇ님도 좋은 한 주 시작하시구 더위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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