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같은 중독성의 영화 놈놈놈

놈놈놈은 분명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내게는 무척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 왜 이 영화를 극장에서 아홉번 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이건 내 스스로에게도 미스테리였다.

처음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는 단순히 만주 벌판을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시원하니까.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많이 지쳤고 숨 좀 쉬고 싶었으니까.
극장에서 두세번 본 영화들은 많다. 내 경우는 보통 어떤 한 씬에 꽂혀서 그 씬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져서 또 볼 때가 많다. 만약 놈놈놈을 두세번 보고 끝났더라면 같은 경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우성이 윈체스터 라이플을 돌리며 시속 70킬로의 영국산 경주마 달리는 장면에 꽂혀서 또 본 영화라고, 그렇게 기억되고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무려 아홉번을 보고야 말았다. 오덕스러움에 스스로도 놀랐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유도 모르고 자꾸 또 보고 싶은 건 뭔가 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놈놈놈에 대한 혹평 중 가장 많은 것이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의견이다.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이 스토리보다 혹은 스토리 못지 않게 그 이외의 것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얘기의 다른 표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지극히 감각적인 영화임은 분명하니 말이다.
더 나아가서 놈놈놈의 중독성이 거꾸로 스토리보다는 바로 그 이외의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스토리는 의외로 중독성이 없다. 이야기를 다 아는데 뭐하러 다시 보나?
드물게 스토리가 꽉 짜여진 데에서 오는 쾌감을 느꼈던 영화는 개인적으로 LA컨피덴셜과 메멘토 정도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나서 죽인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이는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를 이미 다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과 음악은 중독성이 있다. 아름다운 그림은 한번 보고 그만이 아니라 자꾸만 또 보고 싶고 아름다운 음악은 자꾸 또 듣게 된다. 중독성은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영상과 음악에서 온다. 
영화가 스토리 못지 않게 영상과 음악에 공을 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폄하할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날것의 '이야기'가 아닌 예술이고, 그것도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만으로는 잘 쓴 소설이 되기조차 힘들다. 잘 쓴 소설은 훌륭한 문체와 감각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가 아닌 글빨만으로 훌륭한 소설이 되는 일은 종종 있다.

게다가, 과연 놈놈놈의 스토리가 부실한가?  만주벌판 추격씬 하나만 예를 들어 보자. 혹평을 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만주벌판씬이 무척 지겨웠다고 한다. 몇분동안 계속 총만 쏴대서 시끄럽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만주벌판씬은 병춘을 비롯한 삼국파가 태구를 쫓는 것으로 시작된다. 삼국파와 태구의 쫓고 쫓김. 삼국파를 피해 오토바이를 달리던 태구 앞에서 이번에는 창이파가 달려온다. 태구를 발견하고는 이들도 말을 돌려 태구를 쫓기 시작한다. 태구 뒤로 쫓아오는 삼국파와 창이파. 그러다가 삼국파와 창이파가 서로 총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일본군이 합세한다. 태구를 쫓는 삼국파와 창이파. 그 뒤를 쫓는 일본군. 일본군은 인정사정없이 대포와 기관총을 쏴대기 시작한다. 이번엔 이를 보고 있던 도원이 나선다. 태구를 쫓는 삼국파와 창이파. 그들을 쓸어버리는 일본군. 일본군에게 통쾌한 반격을 날리는 도원. 몇단계를 거쳐서야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꺼번에 달리는 씬으로 집약되고 그 다음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감정선을 보여주는 클로즈업 몇초씩. 그리고는 창이가 대포를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다른 말을 잡아타고 달려간다. 이렇게 만주벌판씬은 끝난다.
이게 과연 스토리가 없는 건가? 이렇게 전개되는 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이 함께 말을 달리며 총질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결론만 알면 됐지 영화를 왜 보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겐 놈놈놈은 스토리가 부실하지도 않을 뿐더러 탁월한 영상과 음악으로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고 그래서 정서를 자극하고 그래서 그림이나 음악과도 같은 중독성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그러고 보니 극단의 시청각적 쾌감을 느껴 보라던 김지운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극장에 가는 것이 mp3로 음악을 듣는 것만큼 손쉬운 일이었다면 아마도 난 mp3로 듣고 싶은 음악을 계속 반복해서 듣듯이 놈놈놈을 수십번 수백번은 보지 않았을래나..

by 편식 | 2008/09/15 20:05 | movi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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